책소개
2018년, 다자이 오사무가 세상을 떠난 지 70주기가 되는 해를 맞아 그의 자서전이자 유서와도 같은 두 작품 『인간실격』과 『사양』이 함께 출간되었다. 고전소설 번역의 직역을 주장하며 섬세한 번역으로 사랑받고 있는 새움 세계문학 시리즈로 새롭게 태어났다.
20세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바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대신 이모와 유모의 손에 길러진 어린 시절, 명문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 술과 마약과 연애로 보낸 청춘, 소설가로 성공해 ‘천재 작가’이자 ‘일본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던 사람……. 그의 죽음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20세 때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 그는 일생 동안 네 번의 자살 미수를 거쳐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 시도의 성공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8년 6월 13일, 불륜 관계였던 여자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며칠 뒤 서로의 몸이 묶인 두 사람이 발견되었다. 6월 19일, 이날은 다자이 오사무의 마흔 번째 생일이었다.
다자이는 생전 기성 문학 전반에 비판적이었던 ‘무뢰파(無?派)’의 선두주자로 활동하였다. 반권위ㆍ반도덕을 내세우며 세상의 일반적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 반대하는 무뢰파의 모습은 전후 허무주의가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 중심에 있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문학평론가 오쿠노 다케오가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우리의 존재 근거를, 살아갈 이유를, 다자이의 문학에 걸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다자이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저자소개
다자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아오모리 현(靑森縣) 기타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로, 아버지는 그 지방의 대지주이며 귀족원(중의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8남매 중의 막내로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열등 의식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도 모른 채로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다자이는 고등학교 시절 동인 잡지에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위선을 폭로한 『무한 나락』을 발표했으며, 3학년 때인 1929년에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벌였다. 1930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이후로 사제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도쿄로 찾아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게 되나, 그 때문에 다자이는 고향의 가족들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하였다. 분가 제적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의 다자이가 비합법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구도 에이조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좌익 운동에 가담하였고, 당시의 작품인 『지주 일대』와 『학생군』은 착취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구도가 검거된 이듬해에 자수한 이후로 비합법 운동에서 탈락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 집으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긴자(銀座) 카페의 호스테스와 함께 가나가와 현 에노 섬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다자이만 살아남아 가마쿠라(鎌倉)의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자살에 관하여는 『도쿄 팔경』『인간실격』『광언의 신』『허구의 봄』『광대의 꽃』등에서 다자이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다. 다자이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때의 체험 역시 평생 동안 죄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퇴원 이후의 다자이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할 가망이 없게 되자 미야코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응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한다. 그 후 1935년 가마쿠라의 산중에서 혼자 자살을 기도하고, 결국 미수에 그쳤다. 같은 해 ‘일본낭만파’에 합류하였으며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하지만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한다. 그 후 복막염으로 입원했고,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선보이기도 한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1936년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쓰요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두 사람은 미나카미(水上) 온천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이 자살도 미수로 끝나고, 마침내 하쓰요와 결별한 다자이는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1939년 미치코(石原美知子) 부인과의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다자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며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가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부악백경』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전쟁에서 패하여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무뢰파 작가로서, 이른바 '유행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쌓여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다자이의 최후는 비참했다. 폐의 질환이 악화되어 각혈은 물론, 계단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지경에 이른 다자이는, 1948년 6월 13일 밤 동거 중이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 강 수원지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는 닷세 후인 19일 아침, 썩어 짓무른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이 바로 다자이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다.